中 과잉생산에 독일도 EU 무역방어 강화 요구
전기차 보조금에 현지조달 기준 적용 추진
유럽 공장 갖춘 현대차·기아, 중국차 견제엔 반사이익
부품·배터리까지 원산지 따지면 공급망 현지화 부담
중국산 자동차에 대한 무역장벽을 높이는 데 신중했던 독일까지 중국 견제에 힘을 싣기 시작하면서 유럽 자동차 시장의 경쟁 구도가 다시 한번 흔들리고 있다. 저가 중국산 전기차의 유럽 공세를 막는다는 점에서는 현대차·기아에 호재지만, 규제의 무게중심이 관세에서 현지 생산과 부품 조달로 옮겨가면 국내 업체 역시 공급망을 다시 짜야 하는 부담을 떠안을 수 있어 주목된다.
1일 업계에 따르면 독일 집권 연정을 구성하는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과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최근 불공정 경쟁으로부터 유럽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EU 차원의 무역방어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제안을 내놨다. 독일 의회 관계자들은 중국의 과잉생산 문제가 주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정치권은 EU 차원에서 반덤핑·상계조치 등 무역방어 수단을 더 빠르고 폭넓게 활용할 것을 요구했다. 독일 정부가 EU법에 부합하는 현지조달 기준을 마련하면 현재 독일의 전기차 보조금 제도에도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독일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하는 전기차 보조금이 중국에서 수입된 차량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이는 중국과의 무역마찰을 우려해 보호무역 강화에 상대적으로 신중했던 독일의 기존 태도와 차이가 있다. 중국은 독일 자동차 업체의 핵심 시장인 만큼 독일은 그동안 중국산 전기차 규제 강화에 프랑스 등 일부 EU 회원국보다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중국 자동차 업체가 자국 시장에서 폭스바겐·BMW·메르세데스-벤츠 등 독일 업체의 자리를 빠르게 잠식하는 동시에 유럽 시장으로 저가 전기차 수출을 늘리면서 기조가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독일의 올해 상반기 대중국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2% 이상 감소한 370억유로 아래로 떨어졌다. 2021년만 해도 중국은 독일의 두 번째로 큰 수출 시장이었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9위까지 밀려났다. 중국이 자국산 판매를 크게 늘리면서 독일산 자동차에 의존하던 과거의 무역구조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EU 차원의 중국 견제도 이미 관세를 넘어 공급망으로 확대되고 있다. EU는 중국산 순수전기차에 업체별 상계관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해당 조치는 2029년까지 유지될 예정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러한 무역조치가 지난해 EU 전기차 판매에서 중국산 수입차 비중을 20% 아래로 억제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올해 들어서는 더욱 강경해졌다. EU 집행위원회가 지난 3월 공개한 산업가속화법(IAA)에는 전기차 보조금과 공공조달 등 정책 혜택을 역내 생산과 연계하는 방안이 담겼다.
정책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최종 차량 조립이 EU에서 이뤄져야 하고, 배터리를 제외한 차량 부품 가치의 최소 70%가 EU에서 조달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배터리 역시 셀을 포함한 주요 구성요소 가운데 일정 수 이상을 EU에서 생산하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유럽에서 중국산 차량과 경쟁 중인 현대차·기아에는 기회와 부담이 동시에 작용할 전망이다. 현지 생산 공장이 갖춰진 만큼 최종 조립의 요건에 있어서는 중국 업체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체코와 튀르키예에 공장을 두고 있으며, 현대차가 유럽에서 판매하는 차량 가운데 약 80%가 두 공장에서 생산된다.
기아 역시 슬로바키아 질리나 공장을 유럽 생산 거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유럽 전략형 전기차 EV4 생산을 시작한 데 이어 올해 3월부터 EV2도 현지 생산하고 있다. 중국에서 완성차를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하는 업체와 비교하면 관세와 현지 생산 요건에 대응하기 유리한 구조다.
EU의 규제가 중국산 완성차를 겨냥한 관세에 머문다면 현대차·기아에는 분명 반사이익이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유럽 시장을 공략하는 중국 업체의 가격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럽산 자동차'를 판단하는 기준이 생산지를 넘어 부품과 배터리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더라도 배터리와 전장부품, 소재 등을 한국이나 중국 등 EU 역외에서 공급받는다면 향후 현지조달 규정에 따라 정책 혜택이 달라질 수 있다. 중국을 겨냥해 만든 공급망 장벽이 한국 업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배터리가 변수다. 현대차·기아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국내 배터리 3사가 유럽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지만 양극재와 음극재, 전구체 등 배터리 공급망의 중국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EU가 현지조달 범위를 배터리 셀에서 소재 단계까지 확대할수록 완성차 업체뿐 아니라 국내 배터리·부품업체의 추가 유럽 투자 압박도 커질 수 있다.
반대로 한국과 EU의 FTA가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EU가 최종 규정에서 FTA 체결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현지조달 요건에 포함한다면 한국산 배터리와 자동차 부품은 중국산을 대체할 공급망으로 부상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미국에서 비슷한 공급망 재편에 들어갔다. 현대차는 지난 26일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북미 지역 부품 현지조달률을 현재 약 60%에서 2030년 8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완성차 공장만 미국에 짓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관세와 통상규제에 맞춰 부품 공급망까지 현지화하겠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가 그랬듯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보호정책이 촘촘해질수록 국내 업체들도 현지조달 요건 등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현대차·기아를 비롯한 국내 업체들이 유럽 생산과 공급망 현지화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만큼 규제가 강화될수록 오히려 중국 업체보다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